드미트리 돈스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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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이반 2세의 아들로, 1359년 9세의 나이에 모스크바 대공국의 대공이 되었다. 그는 킵차크 칸국의 지배하에 있던 모스크바 대공국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리투아니아, 트베리 등과 전쟁을 벌였으며, 1380년 쿨리코보 전투에서 킵차크 칸국을 격파하여 '돈강의 드미트리'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러나 이후 킵차크 칸국에 다시 복속되었으며, 1389년 사망 직전 아들 바실리 1세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1988년 러시아 정교회에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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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 1세는 드미트리 돈스코이의 아들로, 1389년부터 1425년까지 모스크바 대공국의 대공으로 재임하며 주변 지역 합병과 리투아니아와의 동맹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고 킵차크 칸국의 침입에 대비했으며, 봉건적 토지 소유 확대와 모스크바 최초의 기계식 시계 제작 등의 업적을 남겼다. - 1389년 사망 - 무라트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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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왕은 고려 제33대 국왕으로 공민왕의 아들이며, 이인임의 추대로 10세에 즉위하여 명덕태후의 섭정을 받았으나, 술과 여색에 빠져 국정을 소홀히 하고 왜구 침입, 명나라와의 관계 설정 문제, 요동 정벌 명령, 위화도 회군 등의 사건을 겪으며 폐위되어 처형되었다.
드미트리 돈스코이 | |
---|---|
기본 정보 | |
이름 | 드미트리 돈스코이 |
로마자 표기 | Dmitry Donskoy |
러시아어 표기 | Дмитрий Иванович Донской |
다른 이름 |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
별칭 | 드미트리 도나이 |
![]() | |
통치 | |
칭호 | 모스크바 대공 |
재위 시작 | 1359년 11월 13일 |
재위 종료 | 1389년 5월 19일 |
선대 군주 | 이반 2세 |
후대 군주 | 바실리 1세 |
블라디미르 대공 재위 시작 | 1363년 |
블라디미르 대공 재위 종료 | 1389년 5월 19일 |
선대 블라디미르 대공 | 드미트리 오브 수즈달 |
후대 블라디미르 대공 | 바실리 1세 |
결혼과 자녀 | |
배우자 | 에우독시아 드미트리예브나 |
자녀 | 바실리 1세 유리 오브 즈베니고로드 |
가문 | |
왕가 | 류리크 |
왕조 | 류리크 왕조 |
아버지 | 이반 2세 |
어머니 | 알렉산드라 바실리예브나 벨랴미노바 |
출생과 사망 | |
출생일 | 1350년 10월 12일 |
출생지 | 모스크바, 모스크바 대공국 |
사망일 | 1389년 5월 19일 |
사망지 | 모스크바, 모스크바 대공국 |
매장지 | 대천사 성당, 모스크바 크렘린 |
2. 생애
이반 2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1359년 아버지 이반 2세의 뒤를 이어 9세의 나이에 모스크바 대공국의 대공으로 즉위했다. 1363년에는 블라디미르 대공 칭호를 받았다. 어린 시절에는 키예프 및 전 루스의 총대주교 알렉세이가 섭정으로서 그를 보필했고, 수즈달·니즈니노브고로드 대공 드미트리가 블라디미르 대공의 지위를 노렸을 때 이를 저지했다.
1368년부터 1372년까지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1372년 모스크바 대공국의 드미트리 대공,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알기르다스 대공이 류부츠크 조약을 체결하면서 전쟁이 종식되었다.
1375년에는 러시아 연합군을 이끌고 트베리를 공격하여 승리했다. 이때 맺어진 조약에서 미하일은 드미트리를 "형"으로 존경하고 블라디미르 대공의 지위를 요구할 권리를 포기했다.
1380년 9월 8일 돈강 상류에서 일어난 쿨리코보 전투에서 킵차크 칸국 군대를 물리쳤다. 이를 계기로 "돈강의 드미트리"라는 뜻을 가진 '''드미트리 돈스코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후 마마이와 적대하게 되어 쿨리코보 전투에서 그를 격파했다. 이 전투는 루스 공국들에게 타타르에 대한 사상 최초의 대승이었고, 모스크바 대공국의 위신과 세력을 크게 확장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러시아가 "타타르의 멍에"에서 벗어나는 첫 계기가 된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그 후 마마이를 멸망시키고 킵차크 칸국을 재통일한 토크타미시 칸은 다시 러시아에 대한 타타르의 종주권을 주장하며 모스크바 대공국을 공격하여 수도 모스크바를 점령했다(모스크바 공방전). 드미트리는 토크타미시에게 다시 한번 신하됨을 맹세하고 대공의 지위와 조세권을 다시 인정받았다.
1389년 죽기 전, 칸의 동의 없이 자신의 아들 바실리 1세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의 유언장에서 블라디미르 대공국을 모스크바의 세습지로 단언하고, 장래 칸국이 동요하면 공납을 중지하라고 지시했다.
2. 1. 초기 생애와 통치
이반 2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1359년 이반 2세의 뒤를 이어 9세의 나이에 모스크바 대공국의 대공으로 즉위했다.[2] 어린 시절에는 키예프 및 전 루스의 총대주교 알렉세이가 섭정으로서 그를 보필했다. 1363년 블라디미르 대공 칭호를 받았다.1368년부터 1372년까지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1372년 모스크바 대공국의 드미트리 대공,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알기르다스 대공이 류부츠크 조약을 체결하면서 전쟁이 종식되었다.[5]
1380년 9월 8일 돈강 상류에서 일어난 쿨리코보 전투에서 킵차크 칸국 군대를 물리쳤다. 이를 계기로 "돈강의 드미트리"라는 뜻을 가진 '''드미트리 돈스코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1375년 블라디미르를 둘러싼 트베르의 미하일 2세와의 분쟁을 자신의 유리하게 해결했다. 북동부 루스 공국의 다른 제후들은 그의 권위를 인정하고 곧 있을 몽골과의 싸움에 군대를 지원했다. 그의 통치 말기에 드미트리는 모스크바 대공국의 영토를 두 배 이상 늘렸다.
1389년 죽기 전, 칸의 동의 없이 자신의 아들 바실리 1세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2. 2. 킵차크 칸국과의 항쟁
1359년 이반 2세의 뒤를 이어 9세의 나이로 모스크바 대공으로 즉위한 드미트리는 1363년 블라디미르 대공 칭호를 받았다. 1380년 9월 8일 돈강 상류에서 벌어진 쿨리코보 전투에서 모스크바 대공국의 지배국이었던 킵차크 칸국 군대를 물리쳐, "돈강의 드미트리"라는 뜻의 '''드미트리 돈스코이'''라는 칭호를 얻었다.[2]드미트리 통치 기간 동안 러시아의 몽골 지배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킵차크 칸국은 내전과 왕조 간 다툼으로 약화되었고, 드미트리는 몽골의 권위가 약해진 틈을 타 공개적으로 타타르인들에게 도전했다. 마마이는 몽골의 장군이자 왕위 계승자로서 드미트리가 권력을 강화하려는 시도에 대한 처벌을 시도했다. 1378년 마마이는 몽골 군대를 파견했지만, 드미트리의 군대에 의해 보자 강 전투에서 패배했다.[5]
2년 후 마마이는 직접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모스크바를 공격했다. 세르기우스 라도네시는 드미트리 돈스코이가 타타르인들과 싸우러 쿨리코보 전투 현장으로 갈 때 축복을 내렸지만, 갈등 해결을 위한 평화적인 수단을 모두 썼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그렇게 했다. 세르기우스는 두 명의 전사 수도승인 알렉산드르 페레스베트와 로디온 오슬랴비야를 러시아 군대에 합류시켰다. 쿨리코보 전투는 두 용장의 일대일 결투로 시작되었는데, 러시아의 용장은 알렉산드르 페레스베트였고, 킵차크 칸국의 용장은 테미르-무르자였다. 두 용장은 첫 번째 돌격에서 서로를 죽였다. 드미트리는 킵차크 칸국을 물리쳤다.[2]
패배한 마마이는 곧 라이벌 몽골 장군인 토크타미시에게 왕위를 빼앗겼다. 토크타미시는 러시아에 대한 몽골의 지배를 재확인하고 모스크바를 함락시켰다. 그러나 드미트리는 토크타미시와 킵차크 칸국에 충성을 맹세했고 몽골의 주요 세금징수관이자 블라디미르 대공으로 복직되었다. 1389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는데, 칸과 상의하지 않고 자신의 작위를 아들 바실리 1세에게 물려준 최초의 대공이었다.[2]
1371년, 드미트리는 마마이에게 그의 권위 아래 블라디미르 대공 지위를 획득했다. 이후 드미트리는 마마이와 적대하게 되어 1380년 쿨리코보 전투에서 그를 격파했다. 이 전투는 루스 공국들에게 타타르에 대한 최초의 대승이었고, 모스크바 대공국의 위신과 세력을 크게 확장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러시아가 "타타르의 멍에"에서 벗어나는 첫 계기가 된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그 후 마마이를 멸망시키고 킵차크 칸국을 재통일한 토크타미시 칸은 다시 러시아에 대한 타타르의 종주권을 주장하며 모스크바 대공국을 공격하여 수도 모스크바를 점령했다(모스크바 포위전). 드미트리는 토크타미시에게 다시 한번 신하됨을 맹세하고 대공의 지위와 조세권을 다시 인정받았다.
3. 가족
모스크바의 에우독시아와 결혼했으며, 수즈달의 드미트리와 로스토프의 바실리사의 딸이었다. 슬하에 최소 열두 명의 자녀를 두었다.[5]
3. 1. 자녀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모스크바의 에우독시아와 결혼했다. 에우독시아는 수즈달의 드미트리와 로스토프의 바실리사의 딸이었다. 이들 사이에는 최소 열두 명의 자녀가 있었다.[5]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다닐 드미트리예비치 | ? - 1379년 9월 15일 | |
바실리 1세 | 1371년 9월 30일 - 1425년 2월 27일 | |
소피아 드미트리예브나 | ? - 1427년 | 랴잔 공 표도르 올레고비치(1402~1427년 통치)와 결혼 |
유리 드미트리예비치 | 1374년 11월 26일 - 1434년 6월 5일 | 즈베니고로드 및 갈리치 공작, 조카 바실리 2세에 맞서 모스크바 왕위 주장 |
마리아 드미트리예브나 | ? - 1399년 5월 15일 | 렝그베니스와 결혼 |
아나스타샤 드미트리예브나 | ? - ? | 홀름 공 이반 브세볼로도비치와 결혼 |
시메온 드미트리예비치 | ? - 1379년 9월 11일 | |
이반 드미트리예비치 | 1380년 - 1393년 | |
안드레이 드미트리예비치 | 1382년 8월 14일 - 1432년 7월 9일 | 모자이스크 공 |
표트르 드미트리예비치 | 1385년 7월 29일 - 1428년 8월 10일 | 드미트로프 공 |
안나 드미트리예브나 | 1387년 1월 8일 - ? | 유리 파트리키예비치와 결혼. 유리의 아버지는 스타로두브 공 파트리카스, 외조부는 나리만타스. |
콘스탄틴 드미트리예비치 | 1389년 5월 14일/15일 - 1433년 | 프스코프 공 |
4. 평가와 유산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쿨리코보 전투에서 킵차크 칸국을 상대로 승리하여 러시아가 "타타르의 멍에"에서 벗어나는 첫 계기를 마련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이 전투는 루스 공국들이 타타르에 대해 거둔 최초의 대승이었으며, 모스크바 대공국의 위상과 세력을 크게 확장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토크타미시가 킵차크 칸국을 재통일한 후, 모스크바 포위전을 통해 모스크바를 점령하면서 드미트리는 다시 한번 토크타미시에게 신하됨을 맹세해야 했다.
1389년 드미트리는 칸의 동의 없이 아들 바실리 1세를 후계자로 지명했으며, 유언을 통해 블라디미르 대공국을 모스크바의 세습지로 선언하고, 칸국이 혼란에 빠지면 공납을 중지하라고 지시했다.[6]
4. 1. 러시아 정교회에서의 시성
1988년 러시아 정교회 공의회는 1988년 6월 6일 모스크바 총대주교 피멘 1세 주도하에 트로이체 세르기예프 러브라에서 드미트리 돈스코이를 시성했다.[6]5. 사진
참조
[1]
서적
Asimov's Chronology of the World
HarperCollins
1989
[2]
웹사이트
Prince Dmitry Donskoy: Victor of the Battle of Kulikovo, who was the first to bring glory to Rus' and unite it
https://www.prlib.ru[...]
[3]
웹사이트
Lives of the Saints
http://www.holy-tran[...]
[4]
웹사이트
The Battle of Kulikovo: When the Russian nation was born
https://www.rbth.com[...]
Russia Beyond the Headlines
2017-07-19
[5]
웹사이트
"Heroes of the Kulikovo battle", The State Museum of Military History, Moscow
https://www.kulpole.[...]
2019-01-02
[6]
웹사이트
ДИМИТРИЙ ИОАННОВИЧ
https://www.pravenc.[...]
2022-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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